자율주행차는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이다
자동차 사고는 오랫동안 인간의 실수로 간주되어 왔다. 운전자의 부주의, 과속, 졸음, 음주가 사고의 주된 원인이었고, 책임 소재도 명확했다. 하지만 자율주행차는 상황을 바꿔놓고 있다. AI가 판단하고, AI가 조작하는 차량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기술의 문제가 아닌, 법과 윤리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레벨3 이상의 고도 자율주행 단계에서는 사람이 아닌 AI가 운전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 있는 근거가 약해진다. 이 상황에서 법률은 기존의 자동차 사고 처리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고, 새로운 책임 구조와 법적 해석 모델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자율주행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책임 구조를 분류하고, 현재 한국의 법제도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향후 어떤 체계적 정비가 필요한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자율주행차 사고 시 발생 가능한 책임 주체의 유형
자율주행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 고려할 수 있는 책임 주체는 다양하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대상은 제조사다. 차량에 탑재된 AI 시스템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특정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우, 이는 ‘제품의 결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경우는 제조물 책임법(PL법)에 따라 제조사가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 둘째, 소프트웨어 개발사 또는 AI 알고리즘 공급자도 책임 주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객체 인식 알고리즘이 특정 인종의 보행자를 잘 인식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는 알고리즘의 편향성과 학습 데이터의 문제로 이어져 개발사에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 셋째, 차량 운전자 또는 소유자 역시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직 완전 자율주행이 아닌 단계에서는 긴급 상황에서 운전자의 개입이 요구되기 때문에, 경고를 무시하거나 차량 유지 관리를 소홀히 한 경우 책임이 일부 전가될 수 있다. 이 외에도 통신망 공급자, 지도 데이터 제공자, 차량 정비소 등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주체들이 연쇄적으로 책임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한국 법제도의 현황 – 어디까지 준비되어 있는가?
한국은 자율주행 기술 도입에 있어 비교적 빠른 정책 반응을 보였지만, 법제도 정비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토교통부는 2020년 「자율주행자동차법」을 제정해 일부 자율주행 기술에 대한 운행 허가, 운전자 정의, 운행 데이터 기록장치 의무화 등을 명시했지만, 책임 구조에 대해서는 뚜렷한 규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사고가 발생하면 일반 자동차 사고처럼 운전자 또는 차량 소유자가 1차 책임 주체로 간주되고, 이후 제조사나 시스템 결함이 입증될 경우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추가 책임이 따르는 구조다. 그러나 이 방식은 AI가 실질적으로 판단을 내린 고도 자율주행 상황에서는 책임의 전가가 어렵고, 소송 과정도 복잡해진다. 무엇보다 AI의 의사결정 과정이 불투명하고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 ‘누가, 왜 잘못했는지’를 입증하기 매우 어렵다. 현재 한국 법제는 자율주행 사고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해당사자 간의 책임 비율을 판단할 수 있는 통합적 법 해석 체계를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미래 자율주행 사회를 위한 책임 구조 설계 방안
앞으로 자율주행차가 일상화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완성도만큼이나 책임 분담 구조의 명확화가 중요하다. 첫째, 한국은 EU나 미국처럼 AI 시스템의 위험 등급 분류제를 도입해, 고위험 AI 시스템(예: 자율주행 레벨4 이상)에 대해선 사전 인증 및 책임 보험 의무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고가 발생했을 때 AI 시스템의 작동 기록을 복원하고 분석할 수 있는 AI 블랙박스 장치의 의무화가 필요하다. 이 장치는 사고 시 AI의 판단 과정을 분석해 책임 소재를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제조사와 운전자, 소프트웨어 개발사 간의 표준화된 책임 분할 계약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사전 계약을 통해 각 주체가 어느 범위까지 책임을 지는지를 명확히 하면, 사고 발생 시 법적 분쟁을 줄일 수 있다. 넷째, AI 의사결정 설명 의무(Explainability Law)를 법제화해, 피해자가 사고 원인과 책임 주체에 대해 알 권리를 보장받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기술 수용성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자율주행차 사고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시험대다
자율주행차는 인간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해지는 새로운 위험을 수반한다. 지금까지의 교통법과 책임법 체계는 ‘운전자가 존재하는 세상’을 전제로 만들어졌고, AI가 운전의 주체가 되는 시대에는 그 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은 자율주행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고 있지만, 그에 걸맞은 법적 인프라는 아직 부족하다. 향후 AI 기술이 우리 삶 깊숙이 들어올수록, 기술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책임 구조를 명확히 하는 법제도 정비가 필수적이다. 자율주행차 사고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미래 사회가 기술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중심의 규제가 아니라, 책임 있는 기술 생태계를 설계하는 새로운 법률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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